한국전쟁때 노동판 전전하다 영화 시작…다른 일로 생업 꾸려본 적 없어
韓紙와 그에 얽힌 사람들 이야기…우리문화 자긍심 지키는 내 분신
한국인만이 담아내는 恨 표현하고 싶었다
영화로 꾸는 꿈…끝나지 않은 실험
101번째 영화…또다른 시작


그가 아니었다면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영화의 한복판에는 언제나 임권택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1987년 `씨받이`로 베를린영화제에서 강수연이 여우주연상을 탔을 때도, 1993년엔 `서편제`로 한국영화 관객 100만 시대를 열었을 때도 그가 있었다.

그는 한국영화가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을 하나씩 현실로 만들어 놓았다. 멀게만 느껴지던 칸 영화제에서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탔을 때 한국영화는 이미 세계 한복판에 있었다. 영화감독 임권택(77). 그에게 `한국영화의 거장`이란 표현은 묵은 김치처럼 익숙하다. 최근 개봉한 `달빛 길어올리기`는 그의 101번째 작품이다. 수많은 작품 중 하나지만 노감독은 새로운 데뷔작이라며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봄기운이 완연해질 무렵 서울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임 감독님의 삶 자체가 영화 같습니다.

▶내 삶이란 게 복잡할 것도 없어요. 영화 말고는 아는 게 없으니까. 전후 전쟁통을 겪으며 부산 노동판에 있다가 영화를 시작한 다음엔 다른 일로 생업을 꾸려본 적이 없습니다. 영화 하나만 알고 그것밖에 모르니 거기서 탈락하면 죽는다고 배수진을 쳤지요. 영화감독 임권택으로 그래도 여기까지 살아온 건 영화에 대한 진취적인 생각을 영화로 옮겼기 때문이죠.

－1960년대엔 잘나가는 흥행 감독이었다고 들었습니다.

▶1962년에 감독으로 데뷔했지요. 그 뒤 10년간 50개 작품을 했어요. 흡족한 작품은 아니에요. 한 50개 작품은 순전히 할리우드 영화 아류죠. 현장에서 배운 거 빼면 온통 서양 영화를 보며 영화를 배웠으니 당시엔 미국 영화에 깊이 경도될 수밖에 없었어요. 액션영화를 좋아했기도 했지만 삼류가 되든 사류가 되든 영화 수준을 끌어올려야겠다는 야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가당치 않다는 걸 깨닫고 절망했죠. 미국은 우수한 스태프와 세계적인 연기자들, 최신 기자재가 있는데 우린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이었잖아요.

－그래서 1970년대 들어 예술영화를 하셨나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내가 한국사람이니까 한국사람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영화, 그런 한국영화를 만들어보자. 흥행을 위해 영화를 만들던 삶과는 전혀 다른 일을 벌이자. 10년간 만든 영화가 허구였다면 그런 허구에서 벗어나 좀 정직한 영화를 만들자. 내가 살아온 한민족의 수난이나 질곡, 이런 거, 나의 개인사까지 포함해 담아보자. 한국인만 갖는 문화적 개성을 담아낸다면 미국 영화보다 완성도는 떨어져도 영화가 갖는 개성은 인정해줄 것 아닌가 생각했어요.

 
한국영화 사상 첫 관객 100만명 돌파한 "서편제".　　　
그렇게 10년간 한국영화를 만들었는데 내 안에 쌓인 게 하루아침에 어떻게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나쁜 습관을 없애는 데 고생 좀 했죠. 그런데 어이없게도 1970년대 군사정권이 결과적으로 절 도와줬어요. 정부가 문화 통제를 하기 위해 4편씩 건전영화를 만들면 외화 쿼터 보상을 해줬어요(당시엔 외화를 수입해 상영하는 게 더 큰 이익을 줬다. 이 때문에 영화사들은 한국영화를 흥행보다는 외화 쿼터를 더 받기 위해 만들었다. 임 감독은 이를 상업성에 구애받지 않고 예술성을 실험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문제는 아무도 내 영화를 안 보는 거예요. 주제의식은 있는데 재미가 없으니까. 위기를 맞으면서 영화에 살을 붙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죠. 그때 1960년대 흥행 감독으로 쌓인 노하우가 도움이 되더라고요.

－1970년대에도 해외 영화제에 나가셨던데요.

▶그땐 내가 만든 영화가 세계 속에서 어느 정도 되는지 몰랐기 때문에 어디쯤 가는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칭찬을 받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죠.

－감독님 영화를 인본주의로 설명하기도 하는데요.

▶1980년대엔 소위 인본주의를 했죠. 인간을 우선시하는 인본주의는 아니에요. 사람과 사람끼리 존중해야 할 존재라는 것이죠. 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이지 준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이데올로기라는 게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만들자는 것인데 그걸 구현하기 위해 이런 전쟁을 일으킨 거라면 없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 생각을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전반까지 담아내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태백산맥`까지 그렇게 10년을 인본주의를 테마로 찍으니까 내 자신이 그런 영화가 지겨워지는 거예요. 제 영화가 세상을 바꾸는 것도 아니고. 그때부터 판소리 같은 우리 예술을 담아내는 영화를 했죠.

－그렇다고 사대부를 다루진 않았습니다.

▶그런 특수 계급, 지식을 풀어서 세상을 만나는, 그런 이룬 자들은 영화에서 다루고 싶지 않았어요. 나도 많이 아는 게 없고. 장인들이 가진 우리 삶의 기층 속에서 그래도 오랫동안 힘을 갖고 생멸해오면서도 여전히 소중하게 남아있는 것에 대해 관심이 있었어요.

－그런 영화 보면 전라도를 배경으로 한 게 많은데요.

▶제 고향도 전라도지만 영화 원작 배경이 거의 전라도예요. 소설가 이청준 선생님께서 해오신 것도 전라도 일원이고. 그쪽 자연이 원작이 갖는 분위기를 내는 데 비슷하고. 다른 도시는 공업화돼서 엄청 달라지고 있는데 전라도는 어지간히 자연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죠. 전 그 배경에서 유년 시절을 살았던 것이고. 강원도처럼 높고 장대한 산을 보면서 자란 게 아니라 전라도의 밋밋하고 순한 산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 배경이 제 정서와도 잘 맞았어요.

－새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에 둘째 아드님이 출연했는데요(둘째 아들은 권현상이란 가명으로 활동 중이다. `달빛 길어올리기`에서는 한지 장인 아들 용기 역을 맡았다).

▶둘째 아들에게 연기자가 되라고 한 적이 없어요. 본인이 하겠다고 해서 관심을 갖게 됐죠. 제가 감독이지만 도울 수 입장은 아니에요. 영화인들과 오래 더불어 살아온 생활이 있는데 좋은 배역을 주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아들도 스스로 개척하겠다고 하더군요. 자기가 성도 권씨로 바꿨어요. 이번 영화에서는 그냥 영화 연기자로서 몸에 풍기는 게 있는지 점검해본 거죠. 제가 보기엔 빠질 만한 걸 갖고는 있는데…. 영화라는 게 죽었다고 생각하고 하지 않으면 힘들어요. 열심히 해달라는 게 아비로서의 바람이죠.

－올해로 매일경제가 45주년을 맞았습니다. 이번 영화에 출연한 강수연ㆍ박중훈 씨와 동갑이죠.

▶서울에 올라와 스카라극장 건너편 골목에서 하숙하면서 살아서 잘 알아요. 그때 충무로에서 영화 일 하면서 매일경제신문 건물 앞을 자주 왔다갔다 했죠. 좋은 자리에 경제신문으로는 처음 와 있었는데 벌써 45년이 됐다니 정말 축하합니다.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

임권택 감독의 새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하나는 `한지`(韓紙)고 다른 하나는 `한지에 얽힌 사람`이다. 한지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나 다름없다. 조선왕조실록 전주사본을 전통한지에 옮기는 복본사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많은 아마추어 연기자들이 한지 장인이나 제지업자, 공무원 등 한지에 관계된 역할로 나온다. 반면 한지로 얽힌 세 사람, 필용 효경 지원의 미묘한 삼각관계를 그릴 때 영화는 철저히 극영화다. 연기자들도 베테랑인 박중훈, 예지원, 강수연이다. 백전노장인 임 감독은 시나리오와 배역으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나눈 뒤 그 사이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그에겐 새로운 시도다. 임 감독에게 그의 또 다른 데뷔작 `달빛 길어올리기`에 대해 물었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가 묘하게 교차합니다.

▶처음엔 한지로 평생을 산 장인의 우여곡절을 찍을 생각이었습니다. 다큐멘터리로 갈 생각은 없었죠. 그런데 취재기간에 실제 복본사업 얘길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화 100편 한 건 나한테 자랑도 아니고…. 다 털고 거듭나고 싶었습니다.

－강수연 씨가 시나리오도 안 나온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찍었다던데요.

▶시나리오에 허구를 자꾸 끼워넣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죠. 과장은 일절 배제했습니다. 평범한 진짜 삶을 어떻게 힘 있게 담아내느냐가 과제였죠.

－카메오로 나온 사람들은 아예 자기 삶을 사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복본사업 연기를 했던 분들 중 상당수는 실제 그 작업을 했던 분들이었어요. 그러니 심지어 카메오들이 상대 역 이름을 실명으로 잘못 부르는 경우도 많았죠. 카메오들의 역할이 곧 자기의 삶이었던 거죠.

－영화 속 7급 공무원 필용이나 다큐멘터리 감독 지원은 왠지 감독님 분신 같습니다.

▶1년 반 동안 장인들을 만나러 다닐 땐 내가 취재자였어요. 나도 오랫동안 우리 것을 담아내 세계 속에서 보편성을 얻겠다는 소망이 있었죠. 그때 서구인들이 자신들이 문화적 기득권을 갖고 있는 양 우리를 얕보는 걸 체험했죠. 우리 문화 자긍심을 지키는 인물이니 제 분신일 수 있죠.

－한지 장인이 화선지와 한지를 비교할 때 지원이 따져 묻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내가 궁금한 걸 물었어요. 한지 세계에 몸담고 있는 분들 만날 때 다들 자기가 최고라 하니 의문이 있었어요. 한지는 밖에 나가면 존재감이 없어요. 우리끼리 좋다고 우겨봐야 아무 소용 없는데. 영화 속 한지 장인은 실제로도 한지에 아주 깊이 들어간 분이라 질문한 겁니다. 한지의 우수성을 부정하자는 게 아니라 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출처 : 매경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