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씨앗 '앉은뱅이 밀'을 아세요?
내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970년도에 보로그 박사라는 미국의 육종학자가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그가 개발한 밀품종이 인도와 파키스탄을 기아에서 벗어나게한 공적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밀은 키가 커서 바람에 쉽게 쓰러져 수확량이 많지 않았는데 그가 개발한 '소노라'라는 밀은 키가 작아 바람을 잘 견더낸 탓에 수확량이 40%나 늘어났다는 것이다. 과연 노벨평화상을 몇 번 더 줘도 될만한 위대한 업적이 아닐까? 그러데 이 소노라 밀의 조상이 우리의 '앉은뱅이 밀'이라고 한다.
자전거를 타면서 알게된 좋은 사람들이 있다. 며칠전 가시연님을 만나 자전거 모임에 관해 의견을 나누며 같이 저녁 식사를 하다가 재밌는 얘기를 들었다.
"비오리, 갯돌, 억새, 조개, 물봉선, 지렁이, 자전거, ... 이런 것들에게 상을 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전거에게 상을 준다구요?"
"올해는 남해에 가서 씨앗에게 상을 주는데 같이 가보실래요?"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에서는 해마다 자연물에 '풀꽃상'을 주는데, 올해로 12번째인 이 상의 주인공이 바로 남해에서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오며 자라고 있는 우리 씨앗 앉은뱅이 밀이다.
저만치 멀리 남해바다가 보이는 이곳은
내 고향과 멀지 않은 경상남도 남해군의 작은 마을이다.
남해의 보물 세가지가 유자, 치자, 비자라고 하는데
비자? 비자가 뭐지? 난생 처음 들어본다.
마을로 올라가는길에 세가지 보물중 하나라는 유자밭이 여기저기에 보였다.
같이 온 일행들은 아마 벌써 마을에 도착해 청소를 하거나,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것이다.
지금 시간이 11시. 시상식까지는 1시간정도 남았다.
지도에서도 찾기 어려운 작은 마을.
오동마을이 오늘 시상식이 열리는 곳이다.
바다를 등지고 바라보면 망운산이 보인다.
망운산 산자락에 있는 저 작은 동네가 오동마을이다.
일요일엔 비가올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구름은 많았지만 맑고 화창한 날씨였다.
마을입구에는 키가 큰 은행나무와
굵은 느티나무 한그루가 있고, 그 사이엔 누워서 한숨자고 가도 좋을
널따란 평상이 있다.
이 느티나무는 무려 500년이나 된것이라고 한다.
낯선 사람을 보면 컹컹 짖을만도 한데 이녀석은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한다.
아직 코뚜레도 하지 않은 어린 송아지도 낯선 사람들의 방문이
신기한듯 두리번 거린다.
마을회관 앞에 모여 계신 할머니들이 고향 사투리로 말을 건네셨다.
"어데서 왔노?"
어제오늘 일은 아니겠지만 마을에는 젊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마을 어르신들이 멋쩍은 표정으로 인터뷰를 하고 계신다.
엄마를 따라온 단잠풀과 꿀잠풀도 시상식때 뭔가 할 모양인지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다.
시상식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서 마을에 있는 제면소를 둘러봤다.
이게 오늘 상을 받을 앉은뱅이 밀이다.
이 제면소에서는 우리 밀로 국수를 만들고 있었다.
마을 아주머니들께서 시상식 후에 있을 잔치준비를 하시는 모양이다.
아직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이곳에서 만든 우리밀 국수를 맛볼수 있을거란 생각에 설레였다.
그래, 이런 음식들도 다 밀가루로 만드는 거였지.
먼저 한조각 집어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꾹 참았다.
드디어 시작된 모양이다.
단상도 의자도 없는 조촐하고 소박한 시상식이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축하공연을 해준 여울목님.
쑥대머리를 구성지게 열창하셨는데 마을 어르신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
단잠풀 꿀잠풀 자매의 축시 낭송.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 회원들은 저마다 풀이름을 딴 별명을 갖고 있다)
꿀잠이는 아직 한글을 잘 읽지 못한다. 아이들의 모습이 귀엽다.
주민을 대표해 마을 이장님께서 상패를 받으셨다.
제12회 풀꽃상
하늘의 기운과 땅의 정기를 담은 우리 씨앗은 유구한
농업 역사를 일구어온 우리 조상들의 숨결입니다.
바람 많은 섬 남해에서 앉은뱅이 밀이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며 대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상업자본의 논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순환형 생태농업의 전통을 잃지 않은
농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우리는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길이 후손에 우리 씨앗을 물려주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남해에서 앉은뱅이 밀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제12회 풀꽃상 부상을 드립니다.
2006년 11월 18일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
"이거 책상 빼닫이 아이가?"
일반 상패와는 달리 그 모양도 소박하고 정감어리다.
마을주민들은 모두 흐뭇하고 고무된 표정으로 상패를 돌려보았다.
마을주민들과 함께 단체 사진 찍는것으로 시상식이 끝났다.
시상식이 끝나고 난뒤 제면소에 모여 함께 점심을 먹었다.
아주머니들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제껀 좀 많이 담아주세요...' 라고 속으로 말했다.
담백하고 슴슴한 멸치 다시물에 미나리와 숙주, 그리고 우리 밀로 만든 면.
이 몇가 지 안되는 재료로 만든 국수 한그릇이
맛이 있으면 또 얼마나 맛있겠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하하하... 정말 맛있었다!
내 옆에서 먹던 단잠이가 남긴것도 해치우고,
그것도 모자라 한그릇을 더 얻어와서는 국물 한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그 거친 손으로 직접 길러 먹는 이 할아버지에게
이 음식은 어떤 맛이고, 어떤 의미일까.
우리 아이들에게 마음놓고 먹일수 있는 이 건강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농부들에게, 또 이런 소중한 가치를 새삼 일깨워주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있는 점심을 먹고 서울로 떠나기 전에 밀이 자라는 모양을 보고 싶어 밭으로 나갔다.
"밀이 어디있나요?" "지금 밟고 서있잖아요."
깜짝 놀라 발 아래를 살펴보니 내 기대와는 너무 달리 잡초처럼 보이기까지 했던
풀들이 누워 있었다.
이게 앉은뱅이 밀이다. 원래 이맘때쯤엔 일부러 밟아주는게 좋다고 한다.
맥주광고에서 보던 멋진 밀밭을 기대했었는데 그건 아직 한참 멀었다고.
기회가 된다면 수확할때 다시 와보고 싶다.
"이것봐요. 벌레가 있어요."
가시연님이 호들갑스럽게 얘기하길래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작고 까만 벌레 한마리가 줄기를 꼭 붙들고 있다.
마치 '여긴 아주 건강한 밭이야' 하고 말하는듯 하다.
마을 주민들은 우리를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아까 먹었던 국수와 이 지역 마늘로 만든 과자, 그리고 밥지을때 넣어 먹어도 좋고,
어디에 심어도 잘 자란다는 앉은뱅이 밀 씨앗을 한봉지 가득 담아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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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져: 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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